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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여자가 있다. 꽃무늬를 수놓은 청바지에 반짝이는 시스루 상의를 입었고, 청재킷을 매치했다. 어깨에 걸친 가방엔 박카스 몇 병과 말보로 담배, 양초와 소주병, 어쩌면 작업에 필요한 싸구려 로션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여자는 장밋빛 입술을 새초롬히 빛내며 공원에 서 있다. 그리고 지나가는 이들에게 곁눈질의 시선을 꽂으며 말을 건넨다. “나랑 연애할래요? 잘 해드릴게-”
‘박카스 할머니’라는 단어는 한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노인에 관한 이슈가 흔히 그렇듯, 파고다 공원에 모여 든 노인들과의 공생 관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단어로 치부된 채 관심에서 멀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박카스 한 병을 건네며 시작하는 그 ‘직업’의 이미지만은 또렷이 남아 있다. 이재용 감독의 신작 < 죽여주는 여자 >는 바로 이 할머니의 이야기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젊은 시절엔 양공주로, 나이 65살이 되어선 공원을 서성이는 이다. 그리고 그 할머니의 역사를 짊어진 배우로 여자, 윤여정을 세워 놓았다.
감독도 기꺼이 알았겠지만 윤여정이라는 배우에겐 어떤 인물도 ‘자기만의 여자스러움, 혹은 여자에 적을 둔 한 인간’으로 풀어내는 개성이 있다. 엄마를 연기하든, 이모를 연기하든, 배우를 연기하든, 할머니를 연기하든 그녀가 발설하는 대사와 몸짓의 자리에는 나름의 개성을 지닌 한 인간이 입체적으로 서 있다. < 죽여주는 여자 >의 주인공, 윤소영이라는 인물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는 취재를 위해 다가온 젊은 다큐멘터리 감독에게 “할머니, 할머니 하지 말아요. 듣는 할머니 기분 나쁘게!”라는 대사를 쏴 붙일 줄도 아는 자존심 있는 여자이기도 했다가 한밤중에 들리는 고양이 울음소리를 어쩌지 못해 밥을 들고 나서는 따듯한 여자이기도 하고, 미국으로 입양 보낸 젖먹이에 대한 죄책감으로 평생을 속죄하며, 자기도 모르게 엄마를 잃은 코피노 아이의 손을 잡고 대문을 들어서는 ‘무작정한 용기’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좁고 오밀조밀한 낡은 집에 세 들어 사는 처지를 벗어나본 적 없어 보이는 그녀의 반경 안엔 또 그만그만한 처지의 ‘이방인’들이 기거하고 있다. 집주인은 트랜스젠더, 옆방 총각은 의족을 달고 다니는 피규어 작가, 언급했듯 그녀가 데리고 온 아이 역시 ‘아빠의 나라’를 찾은 코피노다. 인상적인 것은 이들의 서울살이가 일종의 대안가족 분위기를 띄고 있다는 것. 서로의 사생활을 존중하면서도 일정 부분 사람의 온도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까지가 노인문제, 여성문제, 빈민문제, 소수자의 문제로 읽히는 영화의 주제다.
영화는 언뜻 한 여자의 스산한 궤적을 뚫고 있지만 분명 이 도시의 현재를 드러내고 있다. 영화의 후반부, 윤여정은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의 체포를 저지하는 깃발이 나부끼는 조계사의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리고 백남기 농민 관련 뉴스가 흘러나오는 음식점에서 맥주를 마신다. 녹록지 않은 세상은 그녀에게도 그녀의 바깥 세상에서도 현재 진행형인 것이다. 이는 “살다 보면 세상이 읽힌다”는 감독의 말에서도 드러나는 영화의 시선, 영화가 노인의 죽음과 관련한 질문에 당도할 즈음, 다소 직설적인 화법으로 극을 이끄는 힘이다.
어쩌다 타인의 죽음에 깊숙이 개입하게 된 여자, 윤소영 그리고 윤여정은 말을 아낀다. 대신 어깨를 떨고 발길을 주저하며 표정을 웅크린 채 기꺼운 죽음들을 응대한다. 그렇다. 한 번도 시원스럽지 않았던 생, 언제나 남보다 못하고, 손가락질을 감내해야 했던 생 앞에서 그녀가 당당했다면 뻔뻔했다면 거짓이다. 그 누가 생의 발길질에 두렵지 않을까? 다만 실컷 발길질을 감내하고 또 다시, 묵묵히 일어서는 삶들이 도처에, 이 도시의 도처에 너무도 많다.
글 기낙경(컨트리뷰팅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