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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멈춘 세상에서 나만이 움직일 수 있다면? TV조차 멈춰진 세상, 영화도 볼 수 없는 공간에서 나 혼자 살아 남았다면 무슨 재미로 살아갈까? 그러한 생활이 몇 년이나 계속 되고, 그 끝이 언제인지 알 수 없다면? 13살 소년에게 모든 것이 시간이 멈춘 세상은 ‘재미있는’ 공간이었다가 ‘지루한’ 공간이었다가 결국 ‘공포’의 공간이 되고 만다. <가려진 시간>은 그 멈춘 시간을 건너 현실 세상으로 돌아온 남자 ‘성민’과 그를 유일하게 믿어주는 소녀 ‘수린’의 이야기다.
영화는 ‘실종된 13살 소년이 며칠 후 어른이 되어 돌아왔다’는 판타지적 설정에서 시작된다. ‘성민’과 ‘수린’의 관계를 통해 ‘나를 맹목적으로 믿어주는 단 한 명을 위해서 나는 얼마만큼 희생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모든 것이 멈춰진 세상에서 혼자 살아 숨쉬는 소년에게 ‘삶’은 ‘죽음’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그 영겁처럼 느껴지는 고독의 시간을 지나 비로소 현실 세계로 돌아온 ‘성민’이 위험에 처한 ‘수린’을 위해 다시 ‘가려진 세계’로 떠날 때, 우리는 ‘성민’을 향한 안타까운 기분과 딱 그 만큼의 따뜻한 감정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판타지 영화라는 이색적인 장르, 그리고 ‘믿음과 관계’라는 화두는 대단히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으로 느껴질 법 하지만, 막상 영화는 유쾌하게 흘러간다. 키작은 소년 ‘성민’이 “키 185. 30세 이전에 백 억 벌어 평생 그 이자로 먹고 살게 해주세요”라고 소원을 빌 때, ‘가려진 시간’에 갇힌 ‘성민’이 모든 사람의 지갑에서 딱 만원씩 꺼내어 비상금을 만들 때 등 위트가 넘치는 장면들이 이어진다. 또한, 엄태화 감독이 그려낸 ‘멈춘 시간’을 구현해낸 비주얼도 흥미롭다. 날갯짓을 하는 포즈로 하늘 위에 덩그러니 떠있는 새떼, 크라운 모양으로 멈춰져 있는 물방울, 쇼핑 중에 멈춰 서있는 수십 명의 사람들 등 엄태화 감독이 펼쳐놓은 ‘가려진 시간’의 가상 세계는 굉장히 현실감 넘치는 비주얼로 완성됐다.
<가려진 시간>의 볼거리로 배우 강동원을 빼놓을 수 없겠다. ‘사제복’ 혹은 ‘죄수복’을 입어도 멋진 남자 강동원은 이번 작품에서도 아름다운 외모로 ‘열일’한다. <늑대의 유혹>이나 <검사외전>에서 선보였던 ‘심쿵유발’ 연기를 볼 수는 없지만, <가려진 시간>의 강동원은 소년 ‘성민’의 순수한 미소, 그리고 어른들의 편견에 몰려 겁에 질린 표정 등 그 동안 그가 보여준 적 없던 의외의 얼굴을 보여준다. 청년으로 훌쩍 성장한 것처럼 보이지만 세상을 두려워하며 때때로 어린 소녀 ‘수린’에게 기대는 ‘성민’의 모습은 지금까지 보았던 그 어떤 강동원과도 분명 다른 얼굴이다.
글 박훈희(콘텐츠 기획자)